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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신학대학교 개교99주년기념 초청강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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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몰트만(MOLTMANN)박사
[주제]
"성령과 생명의 신학" 우리와 인간 공동체와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이 땅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도 놀라운 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와 현존이다. 성령 안에서 많은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 중 어느 한 영이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즉
창조적이며 살리시며, 구원하시며,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생동하는 완전한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한다. 우리는 총체적이고 완전하며, 치유 받고
구원받은 삶(생명)을 경험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생명)을,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맛보며,
만지고 본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름은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위로자(Paraklet)와 생명의
샘(fons vitae)이라는 이름이다. I.
하나님의 영의 현존에 대한 성서적 전망 1. 성령에 대한 기도는 모두 '영의 오심'을 바라는 기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며, 이런 특별한 기도를 기독교 전승은 성령의 기원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성령강림절 노래들은 "오소서, 창조자 영이시여"(Hrabanus Maurus, Veni, Creator Spiritus)라는 가사로 되어 있다. 성령에 대한 기도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지향한다. 영은 하나님의 많은 은사 가운데 하나의 은사 이상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무한한 현존이며, 그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깨어나고, 완전히 생동하게 되며, 생명의 능력을 부여 바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오심에 대한 기도는 마라나타 기도이다. 마라나타 기도는 익히 알려진 대로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기도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거의 맨 끝에 있는 말씀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다(계 22 :20).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 중에 그의 오심을 의미하고 있다.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오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을 '영광의 보증'(엡 1 :14, 고후 1:22)이라고도 부른다. 성령 안에서 '지금' 시작되는 것이 '거기'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영광의 나라'는 갑작스럽게 그리고 준비 없이 오는 것이 아니다. 영광의 나라는 '영의 나라'에 이미 선포되어져 있으며,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봄과 여름, 씨뿌림과 추수, 일출과 정오의 관계와 같다.영의 오심에 대한 간구에서 기도자는 기다림에 열려 있고, 영의 에너지가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도록 한다. 인간이 구원을 갈망하며 오직 탄식만 할 수 있을 뿐 탄식 속에서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은 이미 그들 안에서 함께 탄식하며, 그들을 위해서 친히 간구 한다(롬 8 :26). 이 포로된 삶 속으로 , 이 파괴되어진 세계 속으로 하나님께서 오시기를 기도하며 탄식하는 것, 그 자체가 성령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 이것이 성령의 첫 생명의 표징이다. 우리는 성령을 언제나 이중적으로 경험한다. 하나는 우리가 향하여 부르는 신적인 대상으로, 또 하나는 우리가 그 안에서 부르는 신적인 임재, 즉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으로 성령을 경험한다. 이것은 낯선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릴 적에 어머니를 이중적으로 체험했다. 하나는 우리를 감싸안는 현존으로, 다른 하나는 우리를 부르는 대상으로. 성령 간구에 대한 응답은 그의 오심과 머무심, 그의 부으심과 내주하심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우리 마음에, 우리의 공동체에, 우리의 땅에 오시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늘로 도망치거나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 마음과 공동체와 이 땅을 위해 희망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당신의 나라에 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신적인 영이 우리 지상적이고 약한 인간에게 오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속에는 크고 끊임없는 삶에 대한 긍정이 숨어있다. 성령에 대한 기도의 또 다른 응답은 "모든 육체에 영을 부어주는 것"이다(욜 3 :1, 행 2 :17이하). 이 놀라운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모든 육체적인 것"은 우선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창세기 9 : 10 이하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 식물과 나무와 동물을 포함한다. 시편 36: 10은 하나님 자신을 '생명의 샘'으로 부르고 있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의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주겠다고 말한다(요 4: 14). '생명의 샘,'그리고 말라빠지고 메마른 것을 살게 하는 물에 대한 상징은 성령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생명의 물'인 성령은 죽어 가는 것과 시드는 것을 살아나게 하고, 결실을 맺게 한다. 놀라운 것은 성령이 신적 인격으로 뿐만 아니라, '신적인 요소'로도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은 '보내심을 받고' 또 '오신다. ' 그러나 성령은 홍수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 위에 퍼지면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관통한다.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독특한 현존이라면, '하나님의 영의 부어짐 속에서' 모든 육체적인 것은 신적인 것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육체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신적인 것이며, 영원한 하나님 자신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에서
신성이 표현되며, 이것은 여성 신비주의자인 메히틸트 폰 막데부르크가 노래한 것처럼
'부어지고 흐르는 신성'이 된다.
샘에 있든지, 강속에 있든지,
바다에 있든지 물은 같은 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물은 단계적 운동 속에 있다.
그러므로 영 그 자체에서부터 다양한 여러 영적 능력으로의 이동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신적인 것은 그 안에서 인간적인 것,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결실을 맺으면서
성장하고 영원히 살수 있는 포괄적인 현재가 된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139:5). 2.
성령의 근원과 전달 성령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관념적인 질문이 아니라,
필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근원 속에 이미 목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자신의 근원이 되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가져오시며 전달하신다.
그렇다면 성령의 근원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 구약성서의 대답은 대단히 놀랍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시편기자는 기도한다(시 51 : 11). 이것을 우리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깨닫는다 .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9-30). '하나님의 낯'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세심하신 주의와 그의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얼굴은 내적 감정이 표현되는 자리다. 분노와 기쁨, 웃음과 눈물은 우리 얼굴 위에서 표현된다.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얼굴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얼굴"은 유대교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돌이키신 얼굴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과 영원한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은 생명과 영 부음의 원천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의 원천이다. "당신의 얼굴을 우리 위에 비추시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아론의 축복 기도를 우리는 함께 드린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오심에 대한 간구이며,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현재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언제 얼굴이 빛나는가? 사랑하는 순간에 인간의 얼굴은 빛난다. 아기를 가슴에 안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볼 때, 우리는 그녀의 눈빛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무슨 놀라운 것을 선물하려고 할 때, 그의 눈은 흥분으로 빛나게 된다. 반짝이는 눈은 기쁨을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생각하며, 거기에서 성령의 빛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그것보다 더한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기쁨이 넘치는 빛나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면, 우리 가운데서 생명의 확신과 새로운 생명력이 솟아날 것이다.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의 얼굴은 성령의 빛의 근원이다. 성령의 빛은 우리에게 넘치게 되며, 우리의 얼굴은 이 빛을 반사하고 이 빛을 퍼지게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위에 비치며 우리 마음에 밝은 빛이 비치게 하셨다고 말한다(고후 4: 7).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도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반사할 것이라고 말한다(고후 3:17). 우리의 수건으로 가려진 숨겨진 얼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에게 숨겨져 있다. 우리 자신을 만나고 싶은 우리의 동경, 우리 자신을 경험하고 싶은 동경은 '숨어 있음'에서 생기는 것이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보는"(고전 13,12) 계시의 시간에 비로소 성취된다. 영의 체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빛'이며 이 빛과 함께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가 시작된다. 옛 사람들은 성인의 광채와 능력을 거룩한 '후광'으로
표현했고, 성상의 머리 둘레를 황금의 원으로 그렸다.
모든 인간적인 생명과 인간의 얼굴은 '광채'를
가지고 있다. 신뢰와 불신, 안식과 조급함,
평화와 불안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모든 아우라(후광)는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그것은 우리 자아일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일 수도 있다. 신적인 빛의 능력은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또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한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빛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벗어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신약성서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 역사의 구원사적 사건에서부터 생겨난다. 구원사적 사건이란 교회력에도 나타나 있듯이 성탄절-수난의 금요일-부활절-승천-성령강림이 바로 그것이다. 성령강림은 이런 순서의 마지막에 오는 절기이며, 따라서 다른 절기들의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와 뗄 수 없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부터 오셨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또 영원한 영을 통하여 자신을 십자가의 구원하는 죽음에 내주며, 생명을 살리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다시 깨어나며, 영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는 그의 세례에서 시작되어 그의 부활에서 끝난다. 그리고 관계는 다시 역으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도는 영을 자기 공동체에 보내고, 그 공동체 안에서 영은 현존한다. 이것이 영의 그리스도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영이 된 것이다. 영 안에서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는 영을 보내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우리가 자세히 바라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의 비밀 앞에 서 있으며, 생명의 영이 바로 그리스도의 이 신비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이 신비를 구원사적 사건들의 순서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설명한다. '삼일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났고, '사십일 후에'는 하늘에 오르셨고, '오십일 후에는' 공동체에게 자기의 영을 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유일한 신비, 즉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다. 우리가 제자들의 부활신앙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면 그것을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던 여인들과 갈릴리에 있던 제자들만 경험했다. 그것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제자들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리스도와 같은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다. 제자들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찾았고,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부활의 영을 받았다(요 20 :22). "성령을 받아라"고 부활한 이는 말한다. 부활한 이의 현현과 성령의 부으심, 부활신앙과 성령강림 경험은 하나이며, 시간적으로도 구별되지 않는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과 부활의 영 안에서 자기 자신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 없는 영적 부활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40일 동안을 살았던 사람들은 신적인 환상의 종교를 만든 것이 아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현이 멈췄을 때도, 그들은 믿음 안에서 계속 살았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
20 29). 현현한 그리스도의 현재가 영적 그리스도의 현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영이 이미 그리스도의 현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부활절 신앙은 영적
영향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영에게 사로잡힌 것을 의미하며, "미래 세계의 능력"(히
6 : 7)을 자기 자신의 생명과 죽음에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활절 없는 성령강림절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한 성령강림절
없이는 부활절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더 배워야 한다.
부활절과 마찬가지로 성령강림절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의 다른 면이다. 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영의 보내심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구원의 역사적 바깥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신적인 안쪽 면도 있다. 요한복음 14장은 이것을 상세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 장은 예수의 '고별설교'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고별'은 세계의 구원을 위한 그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계의 구원은 '위로자'의 오심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 : 7) 여기에서 성령 안에 있는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 구원의 비밀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십자가 죽음의 희생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는 생명의 영을 보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랑의 계시이며, 여기에서부터 죄인과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생명이 가능해진다. 1986년에 발표된 교황의 교서인 "Dominum et Vivificantem"은 수난의 금요일과 성령강림절의 내적인 상관성을 아주 잘 표현했다. 진정한 십자가의 신학은 성령강림의 신학이고, 기독교적 성령강림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다. 요한복음 14장을 살펴보면, 이 관계가 좀더 복잡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까닭은 이것이 삼위일체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16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달라고 빌기 위해서" 떠난다. 요한복음 14:26은 "그리스도가 아버지로부터 보혜사를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그리스도는 영의 보내심을 아버지에게 빌기 위해서, 그리고 영을 아버지로부터 보내기 위해서 '떠나간다', 즉 죽는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며,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는다. 영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와 영을 보내는 그리스도 사이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성령의 영원한 근원으로서 서 있다. 성령은 서방 기독교의 니케아 신조가 말하듯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들 위에 머물며, 아들로부터 세상으로 빛을 발한다. '영들을 구별하는' 기준에 대한 질문이 빈번하게 제기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게 이 기준은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의 표징'에 있다.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리고 십자가의 표징으로 악령들이 축출 당하고 하나님의 선한 영이 불려진다. 악령 축출에 부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성령을 인식하는 데는 긍정적으로 적용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얼굴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 위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폭력의 영, 소유와 교만의 영은 있을 수 없다. 사랑의 영, 나눔의 영, 겸손의 영만이 성립될 수 있다. 영의 구별에 필연적인 것은 십자가의 표징이다. '예수의 이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격과 삶이 결부되어 있다. '예수를 따르는 일'에 봉사하고 제자직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온 것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 인도한다. 이것은 같은 사건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제자직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영 안의 삶'이라고 말한다. 인격적이고 공적인,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예수님의 제자직은 '영들을 구별하는' 실제적인 기준인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세계적으로 '생명의 신학'이 형성되었는데, 생명의 신학은 새로운 에큐메니칼 운동에 희망적인 계기를 주고 있다. 교황 요한 바울 2세는 "생명의 복음"(1995년 3월 30일)이라는 교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현대의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에 대립시켰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제3분과인 일치분과는 1993년 라르나카에서 "생명의 신학" 연구 프로젝트를 결의했다. 1991년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한국에서 온 정현경 교수는 '생명의 문화' 위에 기초한 '연대의 문화'를 호소했다. 1789년 구스타포 구티에레즈의 책 "생명의신"이 출판되었고 1991년에는 나의 책 『생명의 영』이 출간되었다. 요한 바울 2세가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구티에레즈는 굶주리고 병든 생명에 주목한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창조신학적, 평화신학적,
해방신학적 시각을 종합하는 반면, 나는 제1세계의
무관심하고 의미를 상실한 생명에 관심을 기울인다. 성령강림 경험에 대한 신학적 참여가
완전한 생명의 신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1.
생명의 선교 선교는 근본적이고도 영원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다. 기독교적 선교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르고 그에 상응할 때에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선교, 신앙의 확신을 가진 선교일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따르고, 또 하나님의 선교에 상응하는 행동을 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같은 형상으로 지음 받은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을 존경하고, 그들을 종교적으로 지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로부터 오는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살아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생명'이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그것은 성령이 '생명의 샘'이며 생명, 곧 충만한 생명, 완전하고 파괴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창조적이고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이 이 영원한 생명을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죽음 이전에 가져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데려오고,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나타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이 빛으로 왔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보내는 생명의 영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는 부활의 능력이다. 성령의 보내심은 파괴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과 놀라운 '생명의 기쁨'이 계시된 것과 같다. 예수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복음서는 말한다. 예수가 있는 곳에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쫓겨난 사람들이 받아들여지고, 죽음의 악령이 축출당한다. 성령이 현존하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편지들이 증언한다.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의 기쁨이 넘치는 영원한 생명의 힘이 경험되기 때문이다. 신적인 의미에서의 선교는 죽어 가는 것을 위로하고 생명의 용기를 주는 '생명운동'과 '구원운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이 세상에 가져온 것이 아니다. 예수는 새로운 생명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선교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기독교 제국, 기독교적 문명, 서구세계의 종교적 가치관의 확대로 이해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는 교회의 확장과 이식으로 이해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우리 자신의 신앙결단과 회심경험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기독교 제국의 시민생활, 기독교 문명과 서구적 가치관을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에 속한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성령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회심경험과 신앙결단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일까? 기독교 선교의 모든 전통적인 형태에서 우리는 영의 보내심과 새로운 생명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보았다. 물론 기독교적 생활양식과 교회의 교제, 개인적 신앙의 경험과 결단 등도 선교에 포함된다. 그러나 성령의 선교는 새로운 생명의 선교이다. 아니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종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 교회에서 세계에 이르는 길, 개인적 근심에서부터 전체에 대한 희망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백년 전 독일 뷔텐베르크의 각성운동 설교자인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가 말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기독교 문명이나 서구 세계의 가치관의 전파 대신에,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고 '죽음의 야만성'에 대항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서구,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생명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전에 세계를 정복했던 정복자의 교만을 우리는 이미 상실했다. '황량함이 우리의 생활의 감정이 되었다. 우리는 차가운 '무관심'에 마비되어버린 것과 같다. 가난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보이는 우리의 사회적 냉대는 우리가 그들의 생명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보스니아에서, 르완다에서 일어나는 고난을 보고 있지만, 더 이상 그런 보도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안다는 것은 더 이상 힘이 아니라, 무력함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것이다. 인류는 사회적, 군사적 재난으로 멸망하기 전에 그런 영적인 무관심 때문에 죽을 것이다. '생명의 선교' 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없다. 그래야 우리가 생명을 다시 긍정하고 사랑함으로써, 죽음과 죽음을 확대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아니라 완전하고 나될 수 없는 생명이 필요하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렇게 가까이 계셔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이 사랑의 불꽃만이라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을 알게 되고 일어서서 '곧은 머리'와 '바른 걸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면, 우리의 생명의 영이 깨어나고 우리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힘을 신뢰하게 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빛나는 눈'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얼마나 더 큰 사건이겠는가! 이 생명의 복음에 속하는 것은 그러므로 슬퍼하는 사람의 '위로', 병든 사람들의 '치유', 낯선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죄의 '용서', 곧 파멸의 세력에 의해 위협받고 상처받은 생명의 '구원'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정교회, 로마 카톨릭교회, 개신 교회를 확장하는 대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는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로 초대하는 것이며,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라는 만물의 새 창조의 희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세계의 이런 신적인 미래에 초대를 받았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완성하실 새로움을 오늘 이미 선취할 수 있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열정이 교회의 확장 대신에 등장하면, 우리는 더 이상 추악하게 분열된 유럽교회를 수출할 필요가 없게 된다. 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 대신에 종교적 교파주의를 확산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반종교적 문화혁명이 끝난 후, 그리스도인들이 수용소에 서 풀려나고 지하에서 다시 나오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감리교인도, 침례교인도, 성공회교인도, 장로교인도 없었다. 다만 하나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뿐이었다. 중국의 기독교회는 매우 빨리 성장하여 매일같이 새로운 교회가 생겨나 지금은 4-6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분열된 교회가 에큐메니칼 공동체에 다시 모이고, 그들의 공동의 관심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공동의 관심에 예속시키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공동의 고난, 순교의 경험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교회들에 대한 선교는 세계에 대한 교회의 선교보다 시급하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생명력 있는 공동체가 스스로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생명의 선교'는
무조건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어디든 생명이 있는 곳,
생명이 폭력과 죽음의 위협을 받는 곳, 삶을 향한 용기가 상실되어 생명이
위축되는 곳 어디든지 생명의 선교는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의 영의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의 생명과 다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라고 바울은 강조한다(고전
15 : 53). 성령의 구원의 경륜은 모든 삶과 생명의 영역을 포괄하며,
종교와 영성에 제한될 수 있는 것이다. 2.
모든 피조물의 새로운 창조의 지평에서 영을 체험하기 우리는 이제 성령의 선교를 세 가지로 추적하면서,
성령의 선교에 무슨 일이 일어나며 어떻게 우리가 성령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물을
것이다. 1) 하나님의 백성의 갱신 최초의 기독교 오순절 공동체(행2 : 17ff)는 자기들에게 일어난 것을 예언자 요엘의 예언(욜3: 1-5)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무서운 파국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다. " 이것은 물론 다음 문장이 설명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건한 육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적인 것, 곧 모든 인류를 의미한다. 요엘은 육이라는 말로 무엇보다 "약한 사람, 힘없고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을 표현한다. "너희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늙은 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젊은이들, 더 이상 충만한 삶에 참여할 수 없는 늙은이들이 먼저 생명의 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나 늙은 사람들이 영의 부으심을 받는다. 이로써 새로운 세대간의 평등이 탄생한다. 성령 받기에 누구도 너무 늙거나 너무 젊지 않다. 그들은 모두 새 생명의 영을 받아들이는 데 동일하다. 젊다는 것이 어떤 장점도, 늙었다는 것이 어떤 단점도 아니다.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을 하고, '남종들과 여종들이' 영을 받는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 여자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에 가까이 있다. 남성의 우선권은 있을 수 없다. 여성과 남성의 새로운, 메시아적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같은 능력으로, 같은 권리로 예언한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남성과 여성에게 함께 세례를 했고, 이로써 같은 영적 은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했다. 기독교가 남성에게만 안수를 하고, 여성을 예언과 선포에서 제외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해방하는 활동을 질식시키고 억압하는 것이다. 영의 체험을 통해 남성과 여성, 남종과 여종 사이의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한다. 하나님의 영은 사회적 차별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양한다.
기독교 안에서 일어난 모든 각성운동은 영 체험의 이런 사회 혁명적 요소를 느끼고 또 전파했다.
그것은 가부장제도와 남성 중심의 교회, 노예 소유자에게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 오늘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의 이런 영 체험은 그들을 삶에서 몰아내는 이들에게
위험한 요소가 된다. 상처받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삶에 이런 생명의 영이 임하면,
거대한 우주적 파국의 - "해가 어둠으로 변하고 달이 피빛으로 변하는"
-위협을 받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생명의 영이 임하는 것과 같다.
물론 지금도 생명을 강탈하는 지배자와 부자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영으로 충만한 젊은이와
늙은이, 남성과 여성, 주인과 종들의
공동체는 스스로 이 세상에 대해 '위험 속에 있는 구원',
사라지는 세상에 남아 있는 것, 사라지는 시간 속에 있는 영원한 미래를
선포하고 증언한다. 2)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갱신 구약성서에 따르면 영은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의 영을 통하여 창조한다. 하나님이 자기 생명의 호흡을 거두어 가면 모든 것이 먼지로 돌아간다(시 104 29 이하). 이런 우주적 관련성 속에서 '만물'은 '육'이다. 욥은 "만일 하나님이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 : 14)고 말한다. 땅을 가득 채우고 모든 것을 모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이다(지혜1:7, 사 34:16). 만물은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으로 말미암아 존재케 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통하여 생명을 활성화하는 창조공동체 안에 함께 모인다. 인간도 모든 피조물의 이런 생명공동체에 속한다. 인간이 이 생명공동체에서 벗어나면 살아있는 영을 잃게 된다. 인간이 이 생명공동체를 파괴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생명의 영은 피조물의 '생명의 상호연관성'이다. 만물은 서로 의존해 있으며, 함께 서로 위하면서 살아가며 그리고 빈번히 서로의 안에서 살아간다. 생명은 공동체이고 공동체는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창조의 영과 마찬가지로 새 창조의 영 역시 사람 사이의 생명공동체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 사이의 생명공동체를 건설하신다. 새로운 창조는 육체성을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롭게 하셔서 영원한 생동성을 갖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속에 자기 생명의 영을
주시면, 사람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버리고 '살결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겔11 :19, 36 :27). 이사야
11장이 예언하듯이, 샬롬은 사람과 동물들을
새로운 생명공동체로 불러모을 것이다(사 11장).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사
32: 15, 16). 하나님의 영의 구원경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생태학도 있다. 3) "그리고 당신은 이 땅의 용모를 새롭게 하시나이다" 사람은, 함께 사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땅의 피조물"이다(창 2). 이 땅은 우리 공동의 환경이며, 실재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어머니'이다(시락서 40 : 1). 땅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 있는 지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생명권과 대기권을 포함한 전체적 환경체계를 의미한다. 성경의 전승에 따르면 땅은 식물과 나무와 동물의 생산자이며, 인간도 땅으로부터 나왔다. 이 땅의 모든 생명 공간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창조공동체에 속한다. 현대 산업사회는 땅을 단순한 천연자원으로만 생각하고, 땅을 더 이상 거룩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 재난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땅의 거룩함을 다시 존중할 때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영은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표징이 지금 여기서는 성령자신이신,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 올 것이다(계21장). 하나님의 나라 없는 영원한 생명은 없고, 새 땅 없는 하나님의 나라도 없다.
위의 글은 지난 2000년 5월 16일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경직기념예배당에서 현 튀빙엔대학교 신학부 명예교수이신 몰트만(MOLTMANN) 박사께서 하신 강의 전문으로 동교 전산원 제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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